신구약 66권
주제별 성경공부
1)바울의 기도들
2)공동서신의 기도들

3)주님의 질문들:

   4복음서를 통해 본 제자도

4)주님과의 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5)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6)말씀에 따른 기도
7)아버지의 마음
8)믿음의 삶
9)섬김의 삶
10)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법
11)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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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2장/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울되 진실히 울어야 합니다. - 2001. 8. 22.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3-01-27 19:19    
♠ 사사기 개요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무엘의 등장과 왕정체제
수립까지 약 350년간의 이스라엘의 주요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 전체구조
1:1 - 3:6 실패원인 : 이스라엘의 정복 실패와 우상숭배에 대해서...
3:7 - 16:31 실패반복 : 범죄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구원에 대해서...
17:1 - 21:25 실패모형 : 종교적인 혼란과 도덕적인 부패들을 알려줌으로

1. 1:1 - 3:6 실패원인 : 이스라엘의 정복 실패와 우상숭배에 대해서...
사사기의 도입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1:1-2:5)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시작은 좋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실패하는 여러 부족의 모습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정복사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서술한다.
둘째 부분(2:6-3:7)은 여호수아 죽음 이후의 사건들과
그 시대의 특징인 배교, 우상숭배를 기록하고 있다.
* 구조적으로 매우 비슷한 구조를 두 부분이 갖고 있습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 - 이스라엘 정복실패(1:1-2:5) -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심(2:3)
- 이것은 여호수아가 고별설교시(수23장) 완전히 정복하라는 말씀이 빗나갔음을...
2) 여호수아가 죽으매(2:8)-이스라엘 우상숭배(2:6-3:6) - 역시 쫓아내지않겠다 하심(2:23)
-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풍습과 우사을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세겜에서의 언약 갱신사건(수24장)과 연관된 말씀들입니다.
;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의 죄악을 청산하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할 것을 명받았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완수하지 못했음을 서론에서부터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2. 3:7 - 16:31 실패반복 : 범죄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구원에 대해서...
사사기의 핵심 부분(3:8-16:31)에는 사사들(반은 자세히 기록)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역사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함과 그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사들이 르우벤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에서 차례차례로
하나님이 사사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 어느 지파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고(독불장군 배제)
2) 이스라엘은 협력해서 이끌어 나가야 함을 배우게 한다.
3. 17:1 - 21:25 실패모형 : 종교적인 혼란과 도덕적인 부패들을 알려줌으로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17:1-21:25)에는
사사 통치 기간의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타락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두 사건 언급되었다.
1) 미가와 단 자손의 이주,
2) 레위인 첩의 살해와 베냐민 지파의 몰살

1- 5절 언약을 기억시키는 하나님
1-5절은 1장의 결론이면서 2장의 연결 고리입니다.
1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산적인 신앙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 중에 일부를 다 멸하지도 않았고,
동시에 강력하게 보이는 성에 대해서는 공격도 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신앙은 내 마음, 내 생각, 내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셔서 서운하신 심정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1-2절에 그들이 불순종한 것에 대해 그냥 불순종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언약과 연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영원히 어기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인간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시내산으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가 만약 내가 네게 지시한 것들을 지키면 축복을 누릴 것이요,
만약 너희가 지키지 않으면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십계명과 같은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언제나 언약의 측면을 생각하면서 주께 나가야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나 미리 말씀하십니다.
즉흥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말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그 뜻을 알고 그 뜻대로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미로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도 잘된 지도를 주신 것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도로표시를 했기에 목적지까지 졸지 않는 한 누구나 쉽게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표지판을 안보고 그냥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갑니다.
위험 표지판도 무시하면 끝이지요....
마치 이스라엘이 이러했고, 오늘 우리들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에 먼저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한 주의 말씀만 청종하고 그 대로 살면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듣는 것도 다 주의 뜻을 알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에게 대해 진노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3절에, 나도 너희에게 약속한 것들,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단히 화가 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들먹이신 것은 대단히 화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기분 나쁠 때, 마지막 공격이 무엇입니까?
결혼 파기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것은 마치 그만 두자는 것입니다.
이제 관계를 끊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관계를 끊자는 것입니까?
아니죠, 1절처럼,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을 파기 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정신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경고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인생들은 그 경고 앞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는
매우 둔감했던 것을 봅니다.
(좌우로 밀착시 엉덩이만 들었다가 놈)
순종을 하더라도 일시적으로 순종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측면에 대해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다 이와같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꾸준히 끊임없이 순종을 잘 하고 있습니까?
.......
4절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울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서 주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언약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을 봅니다.
결국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순종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먼것이죠.
이들이 운 것은 3절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웁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심령이 변화받지 않고, 속사람이 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결코 받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주의 은혜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분명해야 합니다. 확실해야 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말에서
이스라엘이 수 많은 전쟁을 통해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우리가 삶 속에서 적용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은혜로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동시에 여기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놓는 그 순간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체의 능력으로는 가나안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대한 자들이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아시죠.
이스라엘이 수 많은 전쟁을 통하여 그들은 전쟁은 하나님이 하심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손 놓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막히겠습니까? 그래서 운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귀중한 진리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수를 얻고자 하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놓은 그 순간 끝입니다.
결코 우리가 세상을 이길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진리를 몸소 뼈저리게 아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예) 출애굽시에 바로가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서 다시 추격하다가 홍해바다에서
애굽군대가 몰살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정신차려야 합니다.
주님이 손을 우리에게서 거두시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늘 '청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깨 맞추고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곤고하고 힘이 들고 어려울 때,
한 번 우리가 얼마나 주의 말씀을 청종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위해 사는 것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언약을 청종치 않음으로 고통이 따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 번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보십시오. 변화가 있는지....
만약 우리가 언약도 기억하지 못하고 청종치 않으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면
빨리 진정한 청종과 회개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그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기억시키고자 채찍질을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죄악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은혜이죠.... 보응이 아닙니다.

한 번 이시간 나의 모습을 보십시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있는가?
만약 청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옆구리에 가시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올무가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1. 전도하십니까? 만약 전도를 가정에서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의 원수가 집에 있게 됩니다. 사회에서...
예2. 자식을 주 안에서 잘 키우지 않아도..
예3. 사랑하지 않으면....
예4. 음행하거나 성적노예가 되어도...
예5. 물질적인 번영에만 몰두해도...

그러므로 우리의 소위를 늘 살핍시다.
그렇다면, 만약 나에게 청종치 않고 죄악 가운데 사는 모습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해답이 6-10절에 나옵니다.

6-10절 망각되어져 가는 하나님

* 서론, 우리는 2:5절까지 첫 번째의 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의 실패와 그 원인을 다룬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2:1-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반응은?
1) 언약을 파기하고 2)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1) 울기는 울었지만 진실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보는 2:6-3:6의 말씀은 서론의 두 번째 부분으로 1)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2)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범죄, 진노, 압제, 부르짖음, 구원, 재범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7-16:31까지의 내용을 등장인물과 장소만 다르지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3) 그러면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이런 죄악들(우상숭배와 반복된 범죄)을 끊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6-1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6-10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배교하고 타락한 원인은
① 지도자의 없음과 교육의 부재(7)
②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청종하지 않은 것이었다(10).
그러나 여호수아 당대에도 보면 불순종의 역사는 있어 왔고
신명기 31장 16-20절에 이미 모세가 예언-언약을 파기하고 바알을섬길것이다 - 했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의 배교와 타락의원인은
①보다도 ②가 더 근원적인 원인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않고 반복적인 점죄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더욱 패괴한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순종의 악순환을 점차 강도 있게 계속하고 있음을 봅니다.
;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악의 길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심!, 만약 내가 주를 알고자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큰 착각이고, 그 삶은 이스라엘이 죄악의 역사를 늘 반복하면서 살았듯이
삶 속에서 죄 앞에서 늘 넘어지고, 심지어 불나방처럼 죄를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이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주의 은혜요,
이처럼 나와 주의 예배드리며 주의 말씀을 들은 연고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심과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끊고, 죄와 싸우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을 알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알다"는 단순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앎이요
삶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앎이다(에베소서에서 바울의 기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불신앙의 죄사슬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계속적으로 알아 갈 때 가능하다.
알되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호6:1-6).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먼저 알기를 원하십니다.
내 방식과 기분으로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 기분대로 섬기면 하나님은 우상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탐심은 곧 우상이기 때문/내가 잘 되기 위해서만 믿는다면)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면서 주께로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십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여건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 어떤 핍박과 박해가 와도 만약 내가 믿음을 지키겠다고 결단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다른사람과 '후손'들에게 이어져 가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몇 대째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시라도 한 눈 팔면, 세상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죄악 가운데 살기가 쉽습니다.
이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서 영향을 미치려면,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자라지 않는 순간, 우리의 속 사람은 약해져 죄악을 이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방해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늘 살펴야 합니다.
나로 하여금 청종치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늘 깨어 나를 근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 없이 넋 놓고 살다가는 흘러가도 모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형식화됩니다.
신앙의 형식화는 매우 위험합니다.

신앙이 형식화되면, 우리는 11-19절까지의 죄악을 삶 속에서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죄악, 도덕적, 종교적 죄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3장에서 전개될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죄악을 미리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11,13 - 범죄/ 2:14 - 진노/ 2:14 - 압제/ 2:18 - 부르짖음/ 2:16,18 - 구원(사사를 통해)/
2:17,19 - 재범죄

결국 이런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1) 언약을 기억하면서 청종 하지 않으면 / 2) 내 마음대로 살고 내 하고 싶은 대로한다.
3) 이 때 신앙은 내 중심, 형식적이게 된다. 4) 죄를 뿌리칠 능력도 없고, 그 이유도 없다.
5) 그 결과 삶 속에서 죄악을 범해도 죄인 줄 모르고 범죄 한다.

11-15절 진노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1. 범죄 : 그럼, 좀 더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1-13절입니다.
이들이 10절처럼 하나님을 모르자 그들은 이제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탐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자...그 결과로 오는 것은 사람들이 쾌락과 마음의 욕심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공식입니다.
세상을 따라가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고, 마귀의 종이 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백성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자기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땅까지 정착시키신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배은망덕도 유분수이지...

그런데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왜요? 그들의 현실적인 이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을 했었고, 광야 40년은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유목보다는 농경사회였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농사를 짓는 것은 그 나름대로 know-how가 있어야 합니다.
옆에 가나안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다고 옆에서 어떤 지식 없이 농사를 지을수는 없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다 보니....
곡식 생산량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가나안 사람들을 보니, 그들이 자신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알과 아스다롯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부신입니다. 바알은 푹풍과 구름, 비신이고, 아스다롯은 다산과 전쟁의 신입니다.
즉 한 해의 소출과 다산을 결정하는 신으로 그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 하나님 외에 여러신들이 있는데,
가나안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신들을 섬겨야 하는 구나?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이방신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믿고, 또 다른 신들을 믿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유익을 얻고자죠.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도 동일한 행동들이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현실의 유익을 위해서 또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학벌과 돈, 권력과 성공주의....물량주의와 쾌락주의....인본주의와 자유주의....
마치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언제, 나 자신도 모르게 세속화되고, 물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의 말씀을 통해서 물들어버린 것들을 찾아내어 정결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염려와 근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재물이 없이는 못살아....한다면....
더구나 우상을 섬기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인 것입니다.
성공주의, 형식주의, 자기 배를 먼저 위하는 삶....

모든 우상은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소원의 성취를 위해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인간의 소원만큼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자....자기의 욕심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면, 자기의 욕심을 통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욕심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달려들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욕심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부정부패중에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도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떨리는 사건이 있었죠, '고급 옷 로비 사건'.....

정말, 이런 일들이 생기고, 또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터질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이 생깁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신가?
더구나 부정부패하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잘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주무시는가? 라는 의구심도 듭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죄인들을 청결하지 않으시는가?
이렇게 이 땅에 우상들이 많은데 왜 그냥 내버려두는가?
더구나 모든 죄악은 11절에 하나님 목전에서 한다고 하는데....모르는 채 하시는 걸까?

그런데, 가만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악을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악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세 번째 틀인 것입니다.

2. 진노와 하나님의 압제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진노와 압제가 누구에게 임하느냐 하면,
불신자들에게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냥, 아예, 나중에 지옥불에 떨어지기에 그냥 죄악가운데 내버려둡니다.
대체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는 그냥 내버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꼭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신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봅니다.
불신자들은 징계를 받으면, 더욱 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굿과 점치는 자들에게 달려갑니다. 더욱 더 악을 행하는 것이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가 어렵죠...물론 하나님께로 오는 자들도 있죠.

반면에 신자들은 징계를 받으면,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신자와 큰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돌아올만 하니깐 하나님이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적당히 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얻어터지고 매맞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신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잘못된 길로 나가고 죄악 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너무 하십니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죠, 자식이기에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죠.
히브리서 12장, 징계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억울하십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맞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맞을 때마다 너무한다고 한다면,
또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 걸려서 신문에 많이 나는 거지?
한다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시고...
먼저 맞는게 훨씬 낳다는 말처럼, 이 땅에서 잘못된 일을 할 때마다 얻어맞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더 멀리, 더 타락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주 맞아야 합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기에, 북어는 패야 제 맛이 난다는 것처럼 자주 맞아서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훨씬 더 많이 맞아야 합니다. 좀 더 때려줘야 합니다.
좀 더 세게 때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얘, 사사기 시대에도 확실하게 다리몽둥이를 확 분질러버리면 괜찮았을 텐데...
걷지 못할 정도로만 취급하시기에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또 범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확 분질러버리지 못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서 기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을 닮고,
거룩한 존재로 만드는데, 있다면,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빗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범죄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참으로 무서운 것을 봅니다.
14절,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파시매..대적을 당치 못하게 함
15절 :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주의를 주셨건만 그들이 말을 청종 하지 않고 범죄한 결과로
진노하시겠다던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18절하반절, 대적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때, 확실한 징계였습니다.
국가적인 징계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됩니다.
더구나 예전에는 자기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가나안인들이 가시노릇하고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남겨놓았던 그들이 오히려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하고, 내가 의지했던 것이 오히려 내 인생에 치명적인
공격을 할 때가 있음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청종치 않는 우리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공격합니다. 비자금도 찾아냅니다. 국민일보가 어떤 신문입니까?
하나님은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지금 요즈음에 벌어지는 것들은 다 나중에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일어날 것들의
예행연습입니다.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비록 자신의 백성을 징계함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는 말을 듣고,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일에 자신은 게이치 않고
오히려 자기 백성의 치부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심지어 바벨론에게 붙잡혀 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신들의 전쟁인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바벨론의 신에게 진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요, 한 사람이라도 올바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오히려 바벨론이라는 곳에 가서 다니엘과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들을
세워놓지 않습니까? 바벨론왕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참신이시고,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단지 매맞지 않을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것보다
맞을 때는 맞아야 하고, 주님의 처분대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손들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죄악된 행실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주님을 우리는 그 징계의 손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징계의 손을 알지 못하면
왜, 나를 치십니까? 왜 나에게 복주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징계를 통해서 나타난 그 사랑의 손길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상실한 것이요,
이것보다 끔찍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주님을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환난 중에 계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듯이
징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징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때 하는 회개가 진짜입니다. 이 때 주를 부르짖음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징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손길을 경험하지 못하면
울되,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 위기만 벗어나고자 웁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음을 봅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 아닙니다.
오늘 나의 문제입니다.
나는 죄악된 길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회개를 함으로 죄악에서 돌아섰습니까?
아니면,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는 회개를 해 본 사람만이 계속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단번에 죄악을 뿌리뽑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계속 진실된 가운데 회개를 하려고 한다면,
점점 우리는 뿌리를 뽑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티눈을 뺄 때, 고약을 발라서 조금씩 조금씩 티눈을 빼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의 회개가 조금 모자라고 부족해 보여도
회개하는 그 순간 진실된 가운데, 한다면....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회개를 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예외 없이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자 이제는 사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징계와 구원, 채찍과 당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하기에, 이 채찍과 당근은 주님 오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 있을 것입니다.

16-20절 사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18절처럼, 부르짖자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십니다.
오늘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어려운 고난과 환경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사사를 보낸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고통에서 우리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또 이 정도로 징계를 해야 주님께 옵니다.
자기 스스로 벗어날 수 있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징계해야 손들고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다른 행동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곧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그냥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11-19절)에서 매우 안타까운 구절들을 계속 보게 됩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말도 가슴이 철렁하는데,
17절을 보면,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쳤다'는 것과
19절에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런 구절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2:10절처럼 행한다면, 우리는 사사시대의 사람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삶 속에서 경험하지 않고,
또 인간의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현실적인 안목에 치우쳐, 근시안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당장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과거의 죄악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마음에 결단을 해도, 2:10절을 극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죄를 짓고자 합니다. 죄를 짓고자 호시탐탐 노립니다.
주변 여건이 안되서 그렇지,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마음과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소욕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내부에 있습니다.
외적 요인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의 검은 내 안의 악을 도려내고 짤라내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쳐 복종케 하지 않거나
십자가에 정욕을 매순간 못박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가지 않으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소욕이 넘쳐납니다.
반복된 죄악 속에서 다람쥐 채 바퀴를 돌 듯이 사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사사가 죽은 뒤 그들은 다시 그 열조보다 더 패괴해 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3세대입니다.
1세대는 여호수아와 장로, 2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이것은 부모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자신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망하게 함을 봅니다.
이것은 매우 주의해서 봐야 할 내용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의 후손은 더욱 더 패괴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악을 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생명없이 무의미하게 보낸 신앙생활의 그 열매는 매우 고통스러운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왜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사사들이 없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1)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2) 또 사사라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직접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보다
사사라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사가 다 해 주겠지죠....내가 해야 하는데...

그래서 신앙생활은 언제나 내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의지해서도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자생력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돕고 함께 동역하는 자입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34)"

동시에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브레이크와 견재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동안에 죄악이 멈추는 그런 일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속한 곳에서 말입니다.
비록 사사기와 같이 패역한 세대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사시대입니다.
분위기, 환경, 주변 여건을 탓하지 말고,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가십시오.
나 혼자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사처럼 주변도 벗어나게 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