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66권
주제별 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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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공동서신의 기도들

3)주님의 질문들:

   4복음서를 통해 본 제자도

4)주님과의 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5)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6)말씀에 따른 기도
7)아버지의 마음
8)믿음의 삶
9)섬김의 삶
10)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법
11)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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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1:1-40/ 버림받았으나 큰 용사가 된 입다 - 2002. 3. 6.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3-01-27 19:31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다 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절했지만(배반)
하나님 역시 끊임없이 여전히 자신의 백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눈 가리고 대충 아웅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분명하게 우리의 죄들을 다루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분명히 해야 할 것들 중에 하나가 죄에 대한 처리입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엄히 분명하게 다루시기에
우리 역시 죄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악을 행하여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암몬자손의 손에 넘기십니다.
즉 암몬자손의 공격이 이유가 없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심심해서 이스라엘을 장난치듯이 외세의 공격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기에 외세의 공격을 당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신앙생활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만나게 하셨다면,
신명기 28장에 나와있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관성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에 근거해서 분명한 행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이 있는데....
내가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려움이 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는 보호하지 못할 영역과 보호하실 능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곤고함이 있을 때, 힘든 일들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소위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오늘의 아픔과 고통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됩니까? 주님....

물론 다니엘처럼, 예레미야처럼, 느헤미야처럼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생활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고 공동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때로는 나와 무관한 일로(?) 인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IMF를 당했는데, 자신의 회사를 잘 경영했다고 안전하게 됩니까?
대체로 다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고쳐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님 혹시 나만을 위해 살아오지 않았는지요? 나라의 경제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나라의 문제를 내 문제로 알고 부르짖어야 하는데 저에게 그런 점이 혹시 없는지요?..등등‘
우리는 곰곰이 그 원인들을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작정 내 잘못은 없고, 다 남이 잘못해서 이런 일들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고난이 끝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일단은 나의 소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위해 암몬의 공격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사사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참으로 의미있지 않습니까? 문제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이것을 동시에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즉 이것은 그 어떤 문제라 해도 그 해결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해결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문제들을 해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차리기만 하면,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나의 잘못을 회개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그 해결을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그 해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셨기에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사로 준비하신 자가 바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 쫓겨나서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었던 입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를 보면, 참으로 유모가 많으신 분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놀래키기를 잘하시는 분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교훈들이 몇 가지 있음을 발견합니다.
1. 먼저 입다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그 무엇인가에 의해 주변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고 해도, 포기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다처럼 그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들림을 받으면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다처럼 자신의 능력을 함양시키고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쓰실 것입니다.
내 형편과 입장에 눌리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지금 준비시키고 계시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 나의 신분과 가정환경, 그리고 내가 당한 고초들로 인하여 너무 연민에 빠지거나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신문지상과 주변사람들로부터 굳굳이 일어선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다시 재기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나라고 해도
입다처럼 기회가 올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소망을 버리지 않고 지금의 삶에 최선의 삶을 살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는 것입니다.
입다가 11절에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을 보면,
입다에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외교적인 답변을 보더라도 입다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나라에서 쫓겨나서 돕 땅에서 유랑하고, 서자이고, 잡류들과 살았던 자였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1절처럼 ‘큰 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었기에, 그는 좋은 소문이 나는 행동을 했었을 것이고
때가 되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홍길동과 홍경래와 비슷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 하나님은 때로는 사람들이 볼 때 입다처럼 전혀 선한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기준에 의해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조금 낫다고 잘난척하거나 우쭐거릴 필요도 없고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안목이 영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안나 선지자가 어린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금방 알아보았듯이....
그런 통찰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저와 같은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져서 사람들을
그 은사에 맞게 잘 섬게 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세상적으로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은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를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3. 반면에 혹시 내가 사람들을 볼 때, 세상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배척하고 왕따 시키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믿음의 눈으로 서로를 봐야 하고
믿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만약 나에게 당시 사람들이 입다를 무시했었던 것처럼 그런 태도가 나에게 있다면,
어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으며, 어찌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며,
또 교회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를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11절을 보면,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로부터 암몬족속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탁월한 말 재주로 그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해 나갑니다.
예를들면, 6절에는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8절,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10절, ‘반드시 시행하리라’
졸지에 단지 군사력의 통치자만 바랬는데, 머리, 즉 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길르앗 사람들이 무엇을 더 주저하겠습니까?
죽느냐 사느냐는 그런 상황에서 입다는 그의 탁월한 말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쫓아냈었던 족속으로부터 ‘머리가 됩니다.’

입다의 말 잘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28절을 보면, 암몬 왕과의 서신교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그러자 암몬 왕이 ‘너희가 내 땅을 취했기에 다시 찾으러 왔다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14절 이하를 보면, 입다가 다시 사자를 보내어서 답변을 합니다.
그 답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15절, 너희 땅을 취하지 않았다.
19절, 오히려 암몬이 아니라 아모리 왕 시혼에게서 이 땅을 취하였다.
24절, 너희 신 그모스가 너에게 땅을 주었듯이 우리 하나님이 이 땅을 주셨으니
더 이상 말 같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도 3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땅을 다시 달라고 하느냐(25,26).....

얼마나 청산유수같이 말하는지 모릅니다. 이 정도면 달변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로 보면, 서자와 같이 설음이 많고 고난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많고 말을 잘합니다.
이 정도로 기선을 제압하고 말을 하자 암몬 왕이 입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
그런데 입다의 강점은 단지 말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1절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려는 일들을 다 고했을 뿐만 아니라
21-24절을 보면,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입다의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니 하나님도 일하시기가 참으로 쉬웠을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지식적으로 알았을 때에는
이슬비작전, 반석에 불붙이기 작전, 보리떡 꿈꾸는 작전....참으로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기에 29절처럼 하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우리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십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판단에는 내가 언제, 어느 시절에 쓰임을 받는가? 라고 의문이 가도
평소에 잘 준비되어 있으면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꼭 큰 일을 해야지만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죠...
지극히 미약하지만 그리고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의 환경과 여건이 주의 일을 할 수 없고 쓰임을 받을 수없다고 단정하지 말고
내가 속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즉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예) 축구선수 중에 송종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한국 축구가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의 경기를 보면 사람들이
다들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히딩크 감독이 오기 전에는 무명에 불과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축구에 한 자리를 우뚝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국가 대표에도 끼지 못했던 자였는데,
오히려 다른 선수를 능가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29절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자, 입다는 그 즉시 순종합니다.
그리고 가면서 군대를 모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그 서원의 내용은 ‘누구든지 내 집 무네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나와서 제일 먼저 기뻐하는 자는 다름 아닌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게그맨처럼....
그래서 그 딸은 번제로 드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40절을 보면, 해마다 여자들이 가서 그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했다고 합니다.

큰 전쟁의 기쁨 대신에 오는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서원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다.
괜히 쓸데없이 분위기에 도취가 되어 감정에 치우쳐 서원을 했기에
엉뚱한 재앙이 그 집안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재앙입니까?)
잘못된 서원을 함으로 입다가 전쟁에 나가는 그 순간부터
그 집안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심코 한 말로 인하여 그 집안 중에 한 사람은 죽어야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서원을 할 때에는 신중히 하라고 합니다.
어떤 서원이 신중히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은 하지말고, 조건부로 하는 것도 하지말고,
하고자 하면 감사의 표시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서원과 또 자신이 서원한 것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입다는 지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원한 대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비참한 것이라고 해도 그는 지켰다는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그 서원 앞에 입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또 울되 딸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울었던 이기적이었만 그는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36절을 보십시오. 입다의 딸은 더 초연합니다.
서원했으니 자기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효녀 심청이 따로 없습니다.
그 딸 역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리고 38절, 그 딸은 2달 동안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게 됩니다.
적) 오늘날 같이 말에 신뢰감이 떨어진 때가 없습니다.
이 나라가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어떤 사람은 ‘신뢰와 협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약속을 쉽게 번복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속을 바꿉니다. 이용합니다. 정치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 서원한 것은 시편15:4처럼, 서원은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입다는 비록 자신의 원하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는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입다가 하나님께 큰 용사로 쓰임을 받았던 이유들입니다.

저는 그런데 끝으로 입다의 서원을 그저 비성경적이고, 감정에 치우쳐 서원을 했고,
그 결과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되었다는 말에 대해 다른 각도로 본문을 보고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12: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즉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입다가 이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레위기 27장을 보면, 서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이 말은 성전에서 한 평생 수절하고 주를 섬긴다는 서원입니다.
즉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입다의 딸은 성전에서 한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KJV을 보면, 38절의 ‘산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라고 되어 있지 않고
‘산 위에서 그녀의 처녀됨을 애곡하더라’로 되어 있고,
2. 39절에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가 KJV에서는 단지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해서 입다의 서원을 쓸데없는 서원이라고 보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영광돌리고 싶은 충정어린 마음에서 이런 서원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생에 주님의 약속에 순종하겠나이다라고 이 시간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