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6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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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공동서신의 기도들

3)주님의 질문들:

   4복음서를 통해 본 제자도

4)주님과의 교제,
   어떻게 할 것인가?
5)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6)말씀에 따른 기도
7)아버지의 마음
8)믿음의 삶
9)섬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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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0:1-5/ 돌라와 야일 - 2002. 2. 20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3-01-27 19:30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을 합니다.
그 중에 6명에 대한 기록은 많은 반면에
나머지 6명에 대한 기록은 오늘 본문처럼 지극히 미미한 것을 봅니다.
선지자를 그들의 예언서의 분량에 따라 대 선지자, 소 선지자로 구분해서 부르듯이
사사들도 그들의 기록 내용에 따라 대 사사, 소 사사로 구분해서 부릅니다.
6명의 소사사는 3장의 삼갈, 그리고 10장에서 돌라와 야일이고,
12장에서 입산, 엘론, 압돈이 소사사입니다.

소사사를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귀중한 교훈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비록 이들에 대한 영웅적인 기록들은 없지만 이들도 사사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보냄을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매우 하찮게 보였지만....
우리는 꼭 많은 일을 하고 놀랄만한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지만
그가 위대한 인물로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사사와 같이 소사사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귀한 사사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행적들에 너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는 안목이
필요하고, 서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다 동일한 사사로 보시는데,
우리가 세상적인 편견을 가지고 외형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역사를 하고 놀랄만한 일들을 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이 미미하고 행적 또한 보잘 것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 내 세울만한 일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계를 움직이는데 큰 부속품도 있어야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작은 부속품들이 수 없이 많은 것을 봅니다.
단지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큰 일을 했다는 것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같은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산 세월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면에 에녹을 보십시오.
야곱보다 더 오래 살았지만 그에 대한 행적은 ‘하나님 동행하였더라’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는 죽임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가는 영광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너무 양적인 측면에 치우치는 행동을 삼가고
질적인 측면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
하나님 앞에는 달란트의 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대로 내가 최선을 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비교를 하고 싶다면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본받기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등장하는 두 명의 소사사가 부럽습니다.
소사사라고 해도 성경에 그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서 3:16절을 보면,
“그 때에(주님의 재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비록 성경에는 없지만, 또 기록되지 않지만
우리의 이름들이 다 하늘나라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다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내가 맡은 은사와 직분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의 연극을 위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주인공도 있지만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대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서로 주연이 되고자 한다면, 어찌 한 편의 연극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몸에 기능이 다른데 다 눈이 되고자 하고 손이 되고자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자의 다양한 기능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기능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내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 줄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하는 가운데 자기의 것들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 어찌 그것에 걸 맞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돌라는 ‘아비멜렉의 후에’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왕이면 돌라도 기드온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해 확실하게 쓰임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를 통해 큰 전쟁과 큰 이적으로 행함으로 이름을 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들이 없습니다.
단지 ‘아비멜렉의 후에’ 사사가 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비멜렉에 의해
나라는 훼파되고 사람들의 심령들은 피폐해 졌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비멜렉이 나타나서 얼마나 나라를 휘져어 났습니까?
나라가 얼마나 흔들렸겠습니까?
그런데 돌라가 나타나서 혼란한 이스라엘을 10절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때에는 주변나라의 공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아비멜렉 이후에 극도의 혼란했던 이스라엘을 안정시켰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꼭 밖의 외세의 침입에 압제에서만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사를 쓰신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도 사사를 쓰셨다는 것입니다.
23년 동안 하나님이 돌라를 사용하셨음을 봅니다.
아마 군사적인 사사보다 행정적인 사사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고 아시기에
혼란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방치해 놓으시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형편에 맞게, 때에 맞는 역사를 하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때에 맞게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이 바로 역사 하실 때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에 단지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맡기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한 채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돌라가 얼마나 잘 사역을 했는지, ‘그 후에’ 등장하는 야일 사사를 보면 압니다.
야일 사사가 나타났는데, 이 사사 역시 외세의 칩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가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고 평화로웠습니다.
그 증거가 그가 ‘어린 나귀 30을 탔고’라는 말입니다.
전쟁의 말이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는 어린 나귀였습니다.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이 화평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사사로서 통치를 잘했다는 말이 되고,
이스라엘에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돌라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된 야일은
‘평화의 시기를 유지하고 길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외부의 핍박과 고난의 시기보다는 화평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거나
국가적으로 다른 종교를 숭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너스의 평화의 시기입니다.
힘든 일제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거쳐, 보릿고개...유신정권 등등
참으로 민족적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눈에 드러나는 주의 종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돌라와 야일의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신앙생활은 가시밭길과 같다고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고통이 연속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이런 평화의 시기, 모든 것들이 잘되고,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시기들이 우리의 일생에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돌라 23년, 야일 22년, 도합 45년의 평화의 시기가 참으로 반세기나 이어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약 50년 동안 평화의 시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때 두 가지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첫째는 기독교 역사를 볼 때,
평화의 시기에는 거기에 걸 맞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의 시기에는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이 발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시기에는 변증보다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를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도 기독교문화를 발전시키고,
기독교세계관을 갖도록 강도있는 교육을 할 필요가 있고,
성도의 신앙수준을 빨리 향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기독교가 평화의 시기에 빨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잘 못된 편견들을 고쳐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에 교회가 헌신해야 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뿐만 아니라 선교에서도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2002년 현재 공식적으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작년 1년 사이에 약 천명의 선교사가 파송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선교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한국이 앞으로도 2만명을 더 선교사로 보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너무도 많은 성도들이 교인의 80%가 선교비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교인들이 선교에 동참하면 더욱 더 많은 선교사를
땅 끝에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도 공식적으로 50명이 선교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출석교인수에 비하면 1/3에 해당도 되지 않는 숫자입니다.
선교비를 보낸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모든 성도들이 다 선교비를 내라고 강조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
핍박의 시기에는 내 문제도 복잡하기에 남들을 위해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선교에 대해 기도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주시는 이 때, 우리에게 주신 그 기회를 잘 선호해야만 할 것입니다.

동시에 둘째로 평화의 시기에 교회는 다시 올 핍박시기를 예비해야하고
동시에 평화의 시기에 잠자기 쉬운 자들을 깨워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때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경계하지 않는다면,
6절처럼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가운데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우기에 금식기도나 철야기도와 같은 것들을 않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안락적인 일에 치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동화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의 때에 잠자기 쉽습니다.
점점 신앙에 대한 열정이 나라적으로 시들어가고 있음을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은 다 직감할 것입니다
위기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또 다시 암울한 시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보다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맡은 일에 더욱 더 헌신해야 하고,
나의 사역의 지경을 넓혀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힘을 더욱 더 내어서 나의 능력의 한계를 더욱 더 높힐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 지체들을 격려하고 함께 자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난의 때, 어려움의 때를 만날 때
넉넉히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지금 평화의 때에 갖도록 해야 합니다.

소사사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사사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의 이름과 지명을 통해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가시나무로서 불로서 이스라엘을 압제했었던 자였습니다
아비멜렉의 통치 방식은 성경의 지도자상과 맞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고 있는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삶과 대조된 삶을 살았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은 그들의 이름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돌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벌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벌레라는 이름을 통해 ‘더럽고 추하다’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은 벌레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돌라가 아비멜렉과 대조적으로
가시와 불로서 통치하기보다는 겸손히 통치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꼭 이렇게 까지 확대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벌레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의 성경에 나타난 용례를 보면,
시편 22:6절에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가 나오는데,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보면서 고백한 극단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2편은 예수님 자신의 고난을 표현하는 말씀으로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고난을 달게 받으시고 감당하시는 겸손한 주님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레 같은 너 야곱아’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그렇게 쓸모 없고 하찮은 자이지만,
주께서 너를 지명하여 자녀 삼으신 그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돌라의 이름이 ‘벌레’인 것을 볼 때,
그의 통치 모습은 주님처럼 겸손하고,
동시에 벌레 같은 돌라를 사사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음을
추측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또 아비멜렉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는 왕이었다’라는 뜻을 가짐으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야일 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밝혀 주는 자,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입니다.
평화스럽게 나라를 잘 통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닌가 다를까, 그의 자식 30명이 30성읍을 다스렸는데,
그 성들을 ‘하봇야일’이라고 부릅니다.
하봇야일이라는 뜻은 ‘야일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식들이 야일이 죽은 후에도 야일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즉 야일처럼 통치를 빛을 비추어 주면서 화평하게 잘 다스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들의 태도는 돌라와 야일과 같아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비멜렉처럼 교만한 것이 아니라 돌라처럼 겸손하고
아비멜렉처럼 어둠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빛을 계속 비추는 그것도 대대로 비추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아비멜렉 사건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명자인 우리들 역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또 어떤 지도자가 되고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까?
겸손하고, 또 빛을 계속 비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하고
또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겸손함과 빛을 계속 비추는 일들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인생들이 다 되시어 이 사회를 구원하는 도구들이 되시고, 평화의 날이 지속되게 하는 도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