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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9:1-57/ 적 사사인 아비멜렉(악을 보응하시는 하나님) - 2002. 1.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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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3-01-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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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사기의 말씀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이렇게도 되는
여러 가지 예들 중에서 한 가지인 아비멜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이방인 여자로부터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여인으로부터 낳은 70명의 친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서자로 태어났기에 그의 설음과 그의 열등감은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엉뚱한 생각을 그는 실행으로 옮겼고,
그로 인하여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오늘 우리에게 비춰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6절입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자기 이복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합니다.
아비멜렉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을 볼 때,
그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특별한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았는가 생각이 듭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왕자로서 의식하게 되었고,
그는 왕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왕에 오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 자신의 외가댁을 이용하고 왕이 되고 합니다.
그의 외가댁은 ‘세겜’ 족속이었고, 이 족속은 야곱의 디나사건 때 우리에게 익숙한
가나안 토착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28절에 있는 것처럼 ‘하몰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외척의 힘을 이용하여 왕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회유책은 2절에 보면, 세겜사람에게 유익한 협상 안을 내어놓는 것을 봅니다.
자기들은 그 당시 이방인으로서 천대를 받고 살고 있었는데,
아비멜렉이 이런 말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우리의 형제’라 하여 동조하게 됩니다.
피차 공생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자 이제는 적극적으로 정치자금까지 도와주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4절에 은 70개를 정치자금으로 주었고, 그 자금으로 ‘방탕하고 경학한 사람,
즉 정치모리배, 정치군인, 정치깡패를 사서
기드온의 70명의 아들 중 요담만 빼놓고 69명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던 것’입니다.
아마 잔치를 벌이고, 안심하게 한 다음에 다 죽인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참으로 정말 잔인하고 끔찍한 사람인 것을 봅니다.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자임을 봅니다.
그리고 6절처럼 세겜지역에서 왕이 됩니다.
아비멜렉의 잘못된 생각과 야망, 삐뚤어진 욕심과 서자로서의 피해망상...
참으로 복잡한 구조 속에 아비멜렉은 일을 저질렀음을 지금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8:34절처럼,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뜻보다는 혈연과 지연, 학연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 어제 개각에 박00라는 사람이 또 등용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코너에 몰리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동향과 학연을 찾는 민족도 드물 것입니다.
그리고 왠만해서는 자신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연좌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교회에서조차 이러면, 큰 일 납니다.
교회 안에서는 오직 경상도, 전라도가 아닌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 사람들은 동문, 동향을 만나면 마음이 안정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비슷한 분위기라서 경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안정과 동문의 마음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온갖 것들을 다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1) 그래서 아비멜렉은 불법의 돈을 받습니다.
그는 ‘바알브릿의 묘’에서 은 70을 받습니다. 즉 바알신당의 헌금인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바알신당을 부셔버린 여룹바알인데,
아비멜렉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으니...얼마나 영적으로 무딘 자입니까?
그리고 그 돈으로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지 않습니까?
; 요즈음의 각종 게이트 사건을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먼지를 알게 합니다. 참으로 큰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고, 기득권자이니....기도해야 합니다.
2) 깡패들을 동원합니다. 우리나라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3) 인정사정 보지 않고 다 죽여버립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제거합니다. 청부살인/
;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다 적입니다.
4) 단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합니다.
이것은 모두 잘못된 지배욕이 가져다준 파괴행동인 것입니다.
3.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은 뭐라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쿠테타도 일으켜 놓고 그럴듯하게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많죠....
-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과 안녕을 위해서는 먼저 힘을 쓰고,
또 이런 것을 먼저 확보한 다음에야 마음에 여유를 갖고 자선이니, 복지를 운운합니다.
세상의 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다 말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을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이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우리나라 정치현실이 이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이런 분위기가
빨리 해결되도록 우리는 주께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7-21절은, 기드온의 70명의 아들 중 요행히 요담 한 사람이 살아남았고,
이 요담은 담대히 세겜 족속이 아비멜렉을 도와 한 행동을 ‘우화’를 사용해서 꾸짖고,
나중에는 아비멜렉과 세겜이 서로 불사름이 있을 것이라는 저주를 하고
아비멜렉을 피해 브엘로 피신가게 됩니다.
요담이 사용한 우화는 4가지입니다.
그 중에 세 개는 좋은 나무인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이고,
나머지 하나는 가시나무입니다.
나무들이 자신의 왕을 위해 4개의 나무에게 다 묻습니다. 왕이 되어 달라고...
그런데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기름과 열매와 새술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기에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그러자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고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그리하지 아니하며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화를 말한 요담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16절 이하에
아비멜렉을 왕을 삼은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운가?’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20절에, 너희 세겜과 아비멜렉이 서로 불을 사르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합니다.
이렇게 요담이 세겜에게 우화를 사용한 것은
1) 결국 세겜의 어리석은 결정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비멜렉과 같은 자를 돕느냐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격도 없는 가시나무와 같은 자인데, 그를 어떻게 돕느냐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자신의 연고나 자신이 유익만 구하면
세겜과 같은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담은 혈연보다 하나님의 뜻과 자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아비멜렉은 마치 가시나무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와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대권을 앞두고 후보가 난립하는 것을 보면, 아찔합니다.
서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제가 아무리 보아도 깜이 아닌데, 자신들이 깜이라고 하니...
그저 ‘차차차기...’를 바라보는 그런 인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분수를 모르기에 ‘허세와 허풍, 그리고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합니다.
그것이 15절이 아닙니까?
공포도 조장하고...여하튼 깡패가 달리 없습니다.
대권후보들의 지키지 못하는 공약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을 봅니다.
우선 대통령이 되고 보자는 것이죠...그리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공약을 해야 하는데...과시용, 전시용이 많죠.
서양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눈가리고 아웅하거나, 대충 넘어가려고 얼버무리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동양과 한국 정서와는 사뭇 다른 가치관들이죠.
그래서 한국정서에서 서양을 보면, 정이 뚝뚝 떨어질 때가 많죠....
그러나 서양사람들을 대면할 때에는 이런 부분에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그런 일들로 인하여 요동하지 말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처럼 자신의 분수와 위치를 알고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괜히 으쓱거리거나 괜히 한 번 해볼까 하는 식으로 밑져야 본전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들을 가지고 있기에, 정작 이 나라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정치 풍토가 이러하기에...
이것은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은사를 잘 파악해서
가장 최대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원대한 비전을 갖고 삶을 주 앞에 드릴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정확한 비전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진정한 다스림은 바로 3나무처럼 ‘섬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작은 일에도 배려하고 섬기려는 자세가 진정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헛된 지위를 추구하기보다는 섬기는 자로서 자신의 맡은 위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남을 지배하려고 들면, 그가 가시나무인 것입니다.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그 자체가 가시나무인 것입니다.
- 우리 모두는 다 제사장으로 동일하게 섬김으로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같은 가시나무 역할은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오직 주만이 진정한 통치자인 것입니다.
22절이하입니다. 세월은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합니다, 평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신 것입니까?
아니 무고한 피를 흘리고 죄악을 일삼는 아비멜렉이 왕이 된 그 마당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요? 그럴 수 없죠. 예, 하나님이 가만히 있으실 수 없죠.
23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그리고 24절에는 악한 신을 보낸 이유로서 ‘악의 보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악을 보응하십니다.
죄가 우리를 추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것에 대해 태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전에 그런 행동들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악의 보응을 위해 ‘악한 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악한 신도 하나님의 손안에, 주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에 의해 제한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활개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악령들의 역사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는, 악한 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보냈다는 말은
그 악령들이 평소에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잡아두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죽이고 도덕질하고 멸망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죄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보응을 합니까?
25절, 아비멜렉의 사람들을 겁탈하게 합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가 되게 합니다.
26-29절, 가알이라는 세겜 사람을 일으켜서 배반하게 합니다.
가알의 말은 간단합니다. 왜 세겜이 이스라엘 사람을 왜 섬기냐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죠. 정당한 주장이 아닙니까? 그러나 들어야 할 말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 이 모든 것들이 다 말이 됩니다. 논리가 정연합니다. 설득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한 영’의 장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안에 만에 하나 ‘가알’과 같은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가 악행을 행치 않도록, 우리 인생이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때문에 회개는 하는 것이고, 빨리 해야 합니다.
악한 영들이 활개칠 때까지 죄악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0-33절입니다.
이런 가알의 음모를 알자 그 성읍의 성주인 스불이 아비멜렉에게 밀고하고
스불을 비롯한 세겜 사람들을 제거하자가 책략을 짜게 됩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제거하자는 전략을 짜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34-45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스불의 말대로 매복했다가 세겜을 공격합니다.
성벽을 헐고, 소금을 뿌립니다.
46-49절 세겜의 망대를 불을 질러 다 죽게 합니다. 요담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죠.
1. 가알은 자신의 힘을 맹신하고 아비멜렉을 과소평가한 결과로 패하게 됩니다
여하튼 악한 영이 개입한 전쟁이기에 비참한 결과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이것은 대량학살이었고, 서로 한 형제라고 했던 자들이 이렇게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어제의 형제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다가는 이런 꼴이 되기 쉽습니다.
언제나 그러므로 정도를 걷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있다고 해도 주의 뜻을 잘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칼을 든 마당에 반란을 기미를 보이는 다른 지역도 공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50절 이하에 나오는 데베스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불을 사르려고 망대 문에 가까이 아비멜렉이 다가서자, 53절입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지자 두개골이 깨져버립니다.
얼마나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그러자 그 아비멜렉은 그 마지막에도 자존심은 강해서,
여인에게 죽었다는 말은 듣기 싫다....죽는 마당에... 네가 나를 찔러달라고 해서 죽게 됩니다.
결국, 요담의 예언처럼 되었던 것을 봅니다. 56-57절입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70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여러분, 사람이 죄를 범하면, 반드시 정죄함이 있습니다.
정죄함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따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법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보편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죄 앞에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미 하나님이 보실 때 범죄 했다고 인정된 것들이 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응 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까?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악령이 우리를 합법적으로 공격할 기회를 주게 됩니다.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넘어선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법, 복음인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내가 받을 죄를 주님께 이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 앞으로도 범죄하는 모든 죄를 친히 다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순간, 주님이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이 되고,
그러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하나님은 심판할 수 없고,
오히려 은혜의 선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죄를 담당했기에 형벌을 주지 않겠노라..
그러나 다시는 죄를 범죄치 말라....
그러나 다음에 또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죠...
그 때에도 다시 회개하면....동일한 변함 없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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